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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벨로 타고 책 읽는 이야기

포토로그 마이가든



[2012년-1월] 광야의 아침 그리고 밤 북노트


  여행할 기회가 생기면 유대광야로 가고 싶다는 제게 선물해준 '열린다 성경 광야편'을 이제야 완독했습니다. 그동안 면접이다 뭐다 마음이 분주하다 보니 책을 펴놓고 정독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이 시간이 더 없이 좋은 책 읽는 시간이기에 독서대 위에 책을 펼치고 의지적으로 다 읽었습니다.

이 책은 이스라엘 선교사로 사역하는 류모세 선교사의 책입니다. 딱딱한 주석이나 해설서가 아닌 에세이처럼 편하게 읽을 수 있는 것이 장점이기에 저도 편한 마음으로 대할 수 있었습니다. 요즘 너무 공부 공부 하다보니 가끔 책에 밑줄을 긋지 않거나 memorize해야 한다는 압박이 있기 때문인데요. 신앙 관련 책을 읽을 때의 장점은 이런 편안함인 것 같습니다.

구성상 31개의 chapter로 나눠서 광야의 민족인 이스라엘 민족의 삶과 습관, 자연환경을 이야기함으로써 성경에 대한 이해를 돕는 것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입니다. 저 역시도 책과 저의 삶에 맞닿아 있는 묵상 point를 가지고 글을 남기고자 합니다.

1. 당신은 양입니까?

흔히 성경에서 양과 염소의 비유가 자주 나오는데 이 때문에 양을 온순하고 착한 짐승으로, 염소는 악랄하고 고집스러운 짐승으로 이해하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 역시도 그랬구요. 그러나 저자는 양을 '겁이 많고 더위를 많이 타며 어린 풀과 다 자란 풀을 구별하지 못하는 짐승'으로 설명합니다. 반면 염소는 '때로는 저돌적이고 길을 앞질러갈 만큼 지혜롭기도 하며 다 자란 풀만 먹고 더위도 덜 타는 기르기 편한 짐승'이라고 하네요. 양과 염소를 3:1 쯤으로 섞어서 기르는 이유도 이런 염소의 지혜로움을 옆의 양이 따라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동시 겁이 많은 양은 쉽게 골짜기를 내려가지 못하지만 용기 있는 염소가 앞서가면 따라가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돌아보면 전 '염소처럼 행동하려는 양'이었음을 깨닫습니다. 스스로 대단히 지혜롭고 용기있다 여겨왔지만, 은근히 더위도 많이 타고 겁도 많으며 먹는 것의 분간도 잘 못하는. 스스로 길을 잃어버린 양이 되어 결국 목자의 음성을 찾는 그런 양이었습니다. 세상에는 더러 대단한 염소들이 많기 때문에 저도 그들 중 한 종자이리라 지레 짐작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의 정체성은 목자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어수룩한 양일 뿐입니다.

2. 우편의 그늘

이스라엘 민족의 방위개념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동서남북과는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스라엘은 지중해를 '뒷쪽', 산지방향을 '앞쪽'으로 여겼다고 하네요. 따라서 성경에서 '우편에 그늘이 되신다'는 표현은 남쪽에 위치한 광야의 뜨거운 햇볕을 면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에 대한 적절한 표현이 되는 것이죠. 더불어 '동에서 서가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옮기신다'는 표현 역시 남북으로 길게 자리한 이스라엘의 영토적 특징상, 세상의 끝과 끝이 된다고 합니다.

살다보면 상황적으로 허락되는 일들이 적절하지 못하다고 여길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조금 지나보면 그 당시에는 완벽하지 않은 일이 정말 완벽했음을 깨닫게 됩니다. 방송사에 입사해서 다른 동기들은 야근에 젖어있을 때도 전 칼퇴근을 했고, 회의에 젖어있을 때는 혁신부서에서 신나게 일을 했죠. 그러나 부서 발령 때는 워낙 악명(?)이 높았던 팀장님 덕분에 공포에 질려 있었습니다. 또 작은 방송사였기 때문에 reputation에 대한 불만도 있었는 지 모르겠습니다.

그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은 묵묵히 제 우편에 그늘이 되어 주셨습니다. 적절한 장소에, 넘치는 감격으로 함께 하셨죠. 성경을 찾아보면 50곳이 넘는 장면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 장면을 회상한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 특유의 묵상 방식인데, 과거를 통해 현재의 신실하심을 바라보는 것이죠. 저 역시도 동일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고 있습니다. 신실하신 주님은 변함이 없으시니까요. 

3. 광야의 아침 그리고 밤


회사를 그만두고 뜻하던 일이 잘 되지 않으면서 푹 쉬는 시간을 갖고 있습니다. 저를 아껴주시던 어르신께서 일을 한참 열심히 하다가 쉬면 약간의 공백에 대해 대처할 방법이 잘 서지 않을 것이라는 예측이 맞았던 시간이었습니다. 하루를 보내는 방법에 대해서 잘 몰랐습니다. 또 그렇게 시간을 어영부영 보내는 것에 대한 스트레스도 있었던 시간이었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라고 할 때 많은 분들이 이스라엘을 찾으셨을 때 적잖이 실망을 하신다고 합니다. 유대광야의 광활함에 놀라기는 하지만 그 척박함에 실망하고, 80년대 개발 도시를 보는 듯한 예루살렘과 이스라엘 전 지역이 성경에서 묘사하는 것과 다르다는 것 때문인데요. 그러다 북쪽에 이르러 시온산과 이스르엘 평야, 갈멜산 일대를 보고나면 '아 이래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구나'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나 이 책에서 설명하는 가나안 땅의 젖과 꿀은 '영적 자산'입니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나일강에 비해 부족한 부분이 분명히 있지만 5000명의 수도사가 광야에 거했던 것처럼 광야를 끼고 있는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만나고 그 이야기에 귀 기울일 수 있는 더없이 좋은 장소입니다. 서쪽 해안가는 블레셋 민족이 거했고 페니키아가 번영했던 곳이지만 물질적 풍요는 영적 빈곤을 유발했을 뿐입니다. 세계 3대 유신교인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는 모두 광야에서 태동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광야에서는 텐트만 있으면 낮에는 그늘을 통해 시원함을 누렸고, 밤에는 텐트 천장을 통해 밤하늘을 보며 하나님을 묵상해 왔던 이스라엘 민족의 삶이 고스란히 존재하는 장소입니다. 물론 그 안에는 많은 도적과 짐승의 위험이 있지만 그 이상 하나님께 집중할 수 있는 더 없는 좋은 장소라는 것이죠. 어떤 계기를 통해 이것을 깨닫게 하신 후로 제가 가지는 시간이 '광야의 아침', '광야의 밤'입니다. '광야의 아침'은 일어나서 말씀 통독을 정해진 양을 하고 인근 홍제천을 산책하며 하나님과 대화하는 시간입니다. 이따금 마음이 답답할 때 하나님께 토로하는 이 시간이 제게 가져다 준 유익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더불어 걷다보면 하나님의 마음을 느낄 때가 있는데 이를 통해 미래가 주는 두려움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광야의 밤'은 자기 전에 말씀을 읽고 기도하는 시간입니다. 시편과 잠언 그리고 신약의 서신서 묵상을 통해 얻은 유익은 방향성에 대한 부분입니다. 이처럼 광야가 주는 유익은 주님 앞에서 더 연습하고 훈련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무엇과도 비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쉬운 점은 이를 보다 잘 활용하지 못했다는 것..? 책을 쓰거나 노래를 쓰거나 조금 더 잘 즐길 수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아직 제가 그 정도 수준은 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아직 끝나지 않은 광야지만, 다시 한번 이 책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여 봅니다.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오늘도 우편에 그늘이 되어주시며 양과 같이 우둔한 저를, 오늘도 아침과 밤마다 먹이시고 입히십니다. 아멘.


[2011-12월] 하나님의 얼굴을 엿보다

 
  [어]린 시절 누구나 다 우주에 대한 낭만이 있을 것입니다. 저도 중학교 때 '스티븐 호킹의 우주'라는 책을 읽고 가슴이 설렜던 적이 있습니다. 우주에 대한 스티븐 호킹의 인터뷰가 너무 좋아서 몇 번을 다시 읽었습니다. 그 때 천체물리학자가 될까는 고민을 심각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제게 수학적 연산능력이 부족한 것을 깨닫고 아쉽게 걸음을 돌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때의 순수한 설레임은 아직까지도 남아, 알리스터 맥그래스의 이 책에 대한 선택을 자연스럽게 만들어 줬습니다. 

  [이] 책은 제가 본 알리스터 맥그래스의 4번째 책입니다. 신학자이자 화학자 출신인 그는 합리적 논증으로 C.S.루이스의 대를 잇는 최고의 변증학자로 꼽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제가 그를 좋아하는 것은 이 책에서 나타나듯이 스토리텔링이 탁월한 작가이기 때문입니다. 처음 보는 사람이라도 '내 평생에 가는 길'이나 이 책을 접한다면 그 그 담담하지만 친절한 화법을 쉽게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사]실 이 책은 우주에 대한 책이라기 보다는 자연현상과 그를 바라보는 인간의 시각 및 철학에서 '신'을 찾는 노력을 기울이는 책입니다. 굉장히 얇게 보이지만 140p가 넘는 분량이어서 다 읽는데 이틀이 걸렸습니다. 기존의 맥그래스의 책보다는 구성에서 조금 복잡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자연과학부터, 프레임, 교리, 피안의 세계에 대한 갈망 등 다양한 주제를 연속성 없이 다루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대학시절 선생님들을 따라 나섰던 가을 전통문화답사와 닮아 있습니다. 방문했던 가옥이나 서원은 별 연속성이 없이 지리적 위치로 점 지어졌고 선생님의 설명도 연속성은 없었지만, 순간을 잇던 선생님의 이야기는 맥락이 아닌 감성으로 수용했기 때문이죠. 이 책의 장점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세계라 생각하는 자연과학에서 발견하는 진리에 대한 목마름과 이에 대한 답을 기독교 전통에서 제시하는 알리스터 맥그래스의 폭넓은 책 읽기가 녹아있어서 편하고 부드럽게 읽을 수 있습니다.

  오 나는 험하게 얽혀 있는 땅 위를 미끄러져
  유쾌한 웃음소리 같은 은빛 날개를 흔들며 하늘에서 춤추네
  손을 내밀어 하나님 얼굴을 어루만지네

  [맥]그래스가 소개한 이 시는 2차 세계대전 참전 조종사이기도 한 시인 존 길레스피 마지(John Gillespie Magee)가 지은 것입니다. 이 시는 맥그래스의 책을 읽으면 이런 시나 문학의 일부를 접할 수 있다는 기대를 이번에 충족시킨 부분이기도 합니다. 더불어 제가 막연하게 생각해왔던 하나님의 얼굴을 보다 편안하게 대할 수 있도록 도와줬습니다. 흔히 하나님의 얼굴은 빛에 쌓여있어서 우리가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는 영역으로 묘사(혹은 설명)됐지만, 시인은 이를 가까이서 편안하게 어루만집니다. Intimacy라는 관점에서 제 일상의 공간에 스며 있지 못했던 하나님의 얼굴이, 제가 사랑해온 밤하늘과 해질녘 하늘에 스며 있다는 이 시가 제게는 얼마나 따뜻한지요. 이 책을 읽은 가장 큰 소득이 아닌가 합니다. 

  고통의 문제에 대해 설명하기 어려운 문제 혹은 예외라고 쿨하게 인정하는 맥그래스의 태도도, 어쩌면 오늘날 교회가 생각해봐야 할 것은 아닌 지 고민하며, 글을 마칩니다. 

 


[2011-11월] 엔도 슈사쿠의 침묵과 흑산, 그리고 대심문관 북노트


  [이] 달의 책, 그 첫번째 책은 엔도 슈사쿠의 '침묵'이 되겠습니다. 사실 여러 목회자 분들로부터 추천을 많이 받은 책이지만, 정작 읽을 기회는 없다가 이번에 선물을 받아 읽게 되었습니다. 알다시피 엔도 슈사쿠는 기독교인으로써 이 책을 쓰고 '이 작품 때문에 받을 신학적 비판도 물론 예상하고 있으나 어찌할 도리가 없다'고 미리 공세적인 방어를 취했으나 개신교계에서는 비판 대신, 열렬한 환호와 함께 많은 독자들이 사랑한 책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책은 전반적으로 화자의 편지글로 구성되었고 일기도 간간히 들어가서, 보고와 고백의 경계를 미묘하게 넘나들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번역본이다 보니 문장이 가지는 매력보다는 소재와 탄탄한 스토리텔링이 돋보이는 책이라 하겠습니다. 

 공교롭게도 최근 발표된 김훈의 '흑산' 역시 초기 한국 천주교사 중 황사영, 정약용 형제의 이야기와 순교와 배교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어 책을 보는 내내 그 이야기와 겹쳐졌기에 부족하지만 함께 글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신]학에서 변함없이 다뤄지고 있는 문제는 고통의 문제와 죄의 책임성, 진리의 배타성 등에 관한 문제인데,  엔도 슈사쿠는 어떤 면에서는 조금 극적인 상황 연출로 독자에게 이 모두에 대해 자문하도록 돕고 있습니다. 포르투갈 선교사 로드리고는 자신을 가르친 스승인 페레이라 신부의 배교에 관한 소문을 듣고 일본으로 잠입하지만 그 역시 배교의 길을 걷게 되었는데 이 부분은 로드리고의 역사적 모델인 조세페 캘러와 일치하는 부분이 있다고 저자 스스로 후기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먼저 부분적으로 엔도 슈사쿠는 로드리고를 통해 본인의 고민을 투영하고 있는데, 특히 로드리고가 신학교에서 신부가 되기 위해 배움을 얻던 시절, 가진 질문들에서 그러합니다. '유다는 그분의 영웅적인 십자가를 위해 조종당한 꼭두각시 같은 존재가 아닌가.'

  다음으로 엔도 슈사쿠는 로드리고를 대상으로 심문을 펼치는 3명의 인물을 통해서 그 자신이 가졌던, 그리고 지난 날의 기독교와 오늘날의 기독교가 접하고 있는 질문을 독자와 공유하고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저자가 이 인물과 질문의 깊이(depth)를 함께 연관 시킨 것 같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 첫 번째 심문관은 통역을 담당하는 일본인으로, '카프랄 신부'를 통해 그가 경험했던 일본에 대한 소위 오리엔탈리즘에 가까운 문화적 멸시에 대해 항의를 합니다. 두 번째 심문관은 이노우에라는 부교오로 배려와 은근한 설득, '구멍 매달기'로 대표되는 악형으로 로드리고에게 배교를 요구하는 매력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추녀와 석녀의 구애라는 신선한 비유를 통해 보편성이 검증되지 않은 진리의 강요에 대한 거부감을 드러내죠.

  마지막 심문관은 로드리고가 그토록 찾았던 페레이라 신부였습니다. 배교 가능성 그 자체로도 놀라웠던 그는 사와노라는 번듯한 일본 이름까지 가지고 살아가고 있었죠. 페레이라는 앞선 심문관들보다 조금 더 깊이있는 질문을 던지는데 첫째 질문인 일본인의 신 관념에 대한 것은 선교역사상 흔히 발견될 수 있는 '왜곡된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습니다. 둘째 질문은 선택과 관련하여 내가 구원될 수 있는 A라는 선택과 다른 사람이 육체적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B라는 선택 중에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면에서 이 질문은 이노우에가 페레이라에게 악마적 장치를 통해 던졌던 질문이기에 진정한 끝판대장은 이노우에일 수 있겠군요. 

 
  [이]쯤되면 눈치 채셨겠지만 이러한 극적 장치는 까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 도스토예프스키가 썼던 '대심문관'의 오마주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제게 이 책을 가르치셨던 선생님께서 이 부분을 가리켜 '기독교 역사상 최고의 기독교에 대한 항변'이라고 하시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굳이 비교를 한다면 대심문관은 '진리와 빵의 문제'라는 조금 더 일상적이지만 본질적인 문제를 지적하지만 엔도 슈사쿠의 심문관들은 조금 더 현상적이고 최종적으로는 윤리적 차원의 질문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엔도의 장치(내가 성화를 밟으면 악렬한 고문을 받는 이미 배교를 결심한 사람들은 살고, 내가 성화를 밟지 않으면 나도 죽고 저 사람들도 함께 죽음)는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마이클 샌델이 질문하였던 'A와 B 중에서 한 사람만 살릴 수 있을 때 어떤 선택이든 살인으로 볼 수 있는가'와 겹친다고 할 수 있겠죠. 

  그래서 두 작가는 결국 '배교'라는 행위에 대해서도 다른 자세를 취하는데, 엔도는 '가장 괴로운 사랑의 행위'라며 긍정하였고 도스토예프스키는 빵과 안정을 택한 대심문관에게 키스를 보냄으로 예수의 마지막 밤을 부활시켰습니다. 이런 다른 결말은 궁극적으로 질문에서 큰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김]훈은 '흑산'에서 조금 다른 시각으로 접근합니다. 사실 이 소설 자체가 앞선 두 책처럼 종교적 성찰을 근본으로 하는 책이 아닐 뿐더러, 저자가 후기를 통해 밝힌 것처럼 '인간의 고통과 슬픔과 소망에 대하여 말하려'한 것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돋보이는 것은 그 역할에 충실하였기 때문입니다. 

  기본적으로 김훈은 띄어쓰기에 매우 능한 작가입니다. 당연히 문법을 의미한 것은 아니고, 예를 들어 '창대는 대답하지 않고 웃었다. 바람이 불어서 바다가 뒤집히는 밤에, 물고기들은 물소에서 어찌하고 있는지, 정약전의 생각은 헤매었다.'처럼 간헐적으로 문장의 의미 사이에 공간을 두어서 독자의 글읽기를 돕고 있습니다. 물론 형식적으로 접속사를 두지 않는 것도 있지만, 이런 여백의 글쓰기가 김훈의 글을 더욱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기본적으로 김훈은 배교자에게 있는 '이유'를 깊이 공감하는 측면에서 엔도와 시각을 같이 합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엔도는 그 이유를 '강함과 약함'에서 찾아 책임의 소지를 인간에게서 전이하려 했고, 김훈은 '마노리'와 '박차돌'을 통해 조금 더 감성적인 측면으로 접근합니다. 논리적으로는 '실수'와 '생존'이라는 단어로 표현할 수 있겠지만, 김훈은 그 이유를 논리적이기 보다 독자가 감정적으로 공감할 수 있도록 상황과 정황 묘사에 힘씁니다. 물론 여기에는 김훈의 '여백의 글쓰기'가 매우 유용한 도구로 쓰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 책은 공통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김훈 역시 사람이고 이런 존재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기에 부분적으로나마 정약전이라는 인물을 통해 사유하고 있습니다. '살아있는 것이 어째서 죽는가. 이것이 천주의 존재증명인가' 정황상 배교자였던 정약전이 품은 이러한 질문 덕분에 정약전은 적대심을 피하였고 김훈은 허구를 피하였습니다. 


  [답]을 우리는 너무 쉽게 구하기도, 또 주기도 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동기의 원인이야 다양하지만 오늘 책을 읽고 동네를 돌면서 하나의 기억을 떠올렸습니다. 회사 사람들 앞에서 강제적으로 지나온 삶을 나누고 난 뒤, 회사 안팎으로 존경과 사랑을 받던 분께서 제게 오셔서 C.S.루이스의 '고통의 문제'를 읽어봤냐고 물으셨습니다. 그 때는 웃으며 읽어봤다고 대답하였는데, 한참이 지난 오늘에서야 갑자기 생각이 났습니다. 사랑하는 이에게 고통스러운 번민의 시간을 겪지 않게 하기 위해 쉽게 답을 주는 마음을 잘 알기에, 그 분의 사랑의 범위와 제가 가진 사랑의 범위가 다르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또 제가 만난 사람들에게 대한 태도를 반성하기도 했습니다. 

  함께 엮인 이 책들이 그런 의미에서 가치가 있습니다. 엔도의 책은 좀 다른 부분이 있지만, 나머지 두 책은 확실히 답을 유보하며 책이 끝난 후에도 독자에게 말을 걸어옵니다. '너의 답은 무엇인가' 묻는 질문에 예전에 했던 답을 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나즈막히 이야기를 걸어오는 목소리가 친근하여 이렇게 글까지 남기게 되었습니다. 더불어 늘 답을 물으면 미워하시고 확인을 하면 좋아하시던 포항에 계신 선생님이 주시던 차(茶)가, 날씨가 차서 그런지 마시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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